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2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내용 == 우선 1981년 2월 11일 전국 1,905개 대통령선거인선거구에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5,278명'''의 대통령선거인이 선출되었다. 이 중 당선이 취소된 부산의 한 선거인을 제외한 5,277명의 선거인들은 2월 25일 지역별로 모여 제12대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당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처럼 모든 선거인들이 한 곳에 집결해 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이 논의됐으나, 5,000명이 넘는 인원이 한 곳에 사고 없이 모이게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있었고 선거인들의 투표 결과가 지역별로 더 상세하게 집계되어야 선거인들이 공약한 바와 다른 후보를 찍는 유권자 배반 행위를 할 가능성이 줄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있어 전국 77개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모여 투표를 진행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대통령 후보로는 [[민주정의당]] [[전두환]] 후보, [[민주한국당]] [[유치송]] 후보,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김종철(1920)|김종철]] 후보, [[민권당]] [[김의택]] 후보 등 4명이 출마하였다. 당시 제대로 된 야권의 대선 주자인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의 [[3김]]은 모두 정치 규제를 당해 출마할 수 없는 상태였고, 대신 신군부에서 기존 정치인들 중 가장 무색무취한 인물로 뽑은 위의 인물들이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출마를 한 것이었다.[* 그나마 유치송과 김의택은 각각 [[신민당(1967년)|신민당]] 최고위원,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을 지낸 바 있어 거물급 인물이라고 주장할 만한 건덕지라도 있었지만 김종철 한국국민당 후보는 대통령 후보라기에는 내세울 경력이 전무했으며 한국국민당 소속 정치인들 중 국회의원 선수가 가장 높다는 것 정도다.] 선거인 후보들의 수준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가 정치를 한 번 열심히 해보겠다,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등의 기본적 공약을 내거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서울 동작구의 한 선거구에서는 후보자 합동연설회 날 2명의 후보가 정확히 같은 연설문을 읽어내려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두 후보가 같은 웅변학원에 연설문을 의뢰했고, 그 학원에서 연설문을 그냥 동일하게 써준 것이다.] 그나마도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제외한 당들은 대부분의 지역구에 선거인 후보를 내지도 못했는데, 민정당 다음으로 많은 후보를 낸 민주한국당도 후보자 수가 선거인단 정원의 5분의 1인 1,000여 명에 그쳐서 설령 민한당 선거인단 후보가 전원 당선된다 쳐도 선거 결과가 뒤바뀔 가능성은 없었다. 심지어 김종철 한국국민당 대통령 후보가 사는 선거구에는 한국국민당 선거인 후보가 없어 김종철 후보는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해야 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21100329202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2-11&officeId=00032&pageNo=2&printNo=10882&publishType=00020|기사]] 선거 결과 전두환 후보가 유표투표수의 '''90.11%'''인 '''4,755표'''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제12대 대통령 임기는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3조와 대통령선거법 부칙 제2조에 따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두환의 당선을 확정 발표한 2월 25일 밤 9시 경 개시되었으나, 취임식은 3월 3일 거행되었다. 이 대선을 통해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으며 이후 더 이상의 간선제 대통령을 원하지 않은 국민들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다. 그래서 12대 대선은 1972년 [[제8대 대통령 선거]]를 시작으로 치러진 '''5차례의 간선제 대선 가운데 마지막 선거'''이며,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부터 '''4년 연속 치러진 간선제 대선으로서도 마지막 선거'''이다. 4년간 연속으로 매년 한 차례씩[* 1978년 박정희, 1979년 최규하, 1980년 전두환, 1981년 전두환.] 대선이 있었다는 것은 [[10.26 사건]] 이후 [[12.12 군사 반란]], [[5.17 내란]] 등이 발생하였던 정치적 혼란과 정국 안정의 미흡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전술했듯 12대 대통령 선거일이 당해 [[2월 25일]]이었기에, 전두환의 제12대 대통령 임기는 당선일을 기준으로 만 7년인 1988년 2월 24일까지였으며, 후임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의 6명의 대통령 역시 모두 2월 25일에 취임하였다.[* 전두환을 포함한다면 7명이나, 전두환은 정권 장악 후 11대 대통령으로 이미 전년도인 1980년 8월 27일자로 취임하여 이미 6개월 정도를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임일이라고 말하기 애매해진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임기 단축이 이뤄짐으로서 19대 대선 이후 때부터 [[5월 10일]]을 취임일로 삼게 되었다.[* 더불어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에서 선거법상 대통령 선거일을 "대통령의 임기 만료일 전 70일부터 첫 번째로 돌아오는 수요일" 등으로 규정하였으므로, 70일 전은 [[12월 16일]]이 된다. (선거일의 요일은 때마다 수, 목, 금 등 변동되었음), 특히 [[16대 대선]](목요일)/[[17대 대선]](수요일)/[[18대 대선]](수요일)의 경우는 모두 [[12월 19일]]에 치러졌다. 대통령의 임기 만 5년은 산술적으론 365 × 5 = 1825일이지만, 여기에 [[윤년]]이 들어가기 때문에 1826~1827일이 되는데, 17대 대통령 임기의 경우처럼 임기 중 윤년이 두 번 들어가는 경우 7로 나누어 떨어져 선거일이 고정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17대 대통령인 [[이명박]]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그리고 그가 당선된 17대 대선과, 그의 임기 중 치러진 18대 대선 모두가 12월 19일이었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